자수 샘플러에 수백 년 전 소녀들의 이름이 남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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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이 줄지어 있고, 그 아래로 꽃과 새와 집이 수놓인 네모난 천. 유럽 자수 · 의상 카테고리를 넘기다 보면 이렇게 생긴 천 조각이 여러 번 나온다. 샘플러(sampler)라고 부르는 물건이다. 여기서는 그중 세 점을 본다. 1727년, 1824년, 1827년에 세 소녀가 각각 완성한 것들이다.
연습장 귀퉁이에 남은 이름
샘플러는 처음부터 작품으로 만든 물건은 아니었다. 연습장이자 견본이었다. 17~19세기 유럽과 미국의 소녀들은 바느질을 배우면서 알파벳, 숫자, 기본 무늬를 차례로 수놓았고, 손에 익으면 집이나 나무, 성경 구절처럼 복잡한 도안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샘플러에는 만든 사람의 이름과 완성한 해가 함께 수놓인 경우가 많다. 이 세 점도 소장 기록에 만든 이가 작가로 올라 있고 출생연도까지 적혀 있어서 나이를 헤아릴 수 있다. 메리 그리피츠는 1713년 무렵, 앤 파자컬리는 1811년, 해나 블룸필드는 1813년생이다. 각각 열네 살, 열세 살, 열네 살 무렵에 바늘을 내려놓았다. 여성의 이름이 작가로 남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어느 집 아이의 연습작이었기에 도리어 그 이름이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이름이 남은 샘플러는 1735년에서 1823년까지의 샘플러 여섯 점에 더 있고, 거꾸로 이름이 잘려 나간 한 점은 숟가락 두 개와 이름 없는 사슴 샘플러에서 볼 수 있다.
띠, 풍경, 견본: 세 소녀의 세 가지 천
메리 그리피츠(Mary Griffits)의 샘플러는 폭 15.2cm, 길이 89.5cm의 가늘고 긴 띠다. 소장 기록에 따르면 아마천에 비단실로 수놓았다. 17~18세기 유럽의 띠 샘플러는 길쭉한 천에 무늬를 한 띠씩 쌓아 내려가는 형식이라, 만드는 사람의 연습장이면서 도안을 모아 두는 견본첩 노릇도 했다.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가면 알파벳 여러 줄, 하느님을 경외하고 왕을 공경하라는 뜻으로 읽히는 줄이 나오고, 그다음 가장 넓은 자리를 십계명이 차지한다. 돌판 두 장을 본뜬 칸 안에 영어 글자가 빼곡하다. 그 밑에 이름과 1727이라는 연도가 있고, 맨 아래에는 붉은 꽃과 나무, 삼각형과 마름모를 되풀이한 기하학 띠가 깔려 있다.
앤 파자컬리(Anne Fazackerley)의 1824년 샘플러로 넘어오면 판이 확 바뀐다. 세로가 조금 긴 45.1 × 37.5cm 천을 붉은 꽃무늬 테두리가 두르고, 안쪽 위에는 덩굴 화환과 날개 달린 작은 형상들이 있으며 화환 양끝에서 붉은 술이 늘어진다. 가운데는 네 줄짜리 시다. “Virtues the chiefest Beauty of the mind”로 시작해, 덕이야말로 사람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시 아래로는 풍경이 펼쳐진다. 나무와 붉은 집, 소 한 마리, 파란 상의를 입은 남자와 흰 옷의 여자, 작은 개. 양모 바탕에 비단과 셔닐로 수놓았다고 소장 기록에 적혀 있는데, 셔닐은 올이 도톰한 실이어서 나뭇잎이 솜털처럼 부풀어 보인다. 맨 아래에 “Anne Fazackerley 1824”.
해나 블룸필드(Hannah Bloomfield)의 1827년 샘플러는 앞의 풍경형과도 또 다르다. 장면을 그렸다기보다 도안 견본에 가깝다. 맨 윗줄은 알파벳을 한 자씩 건너뛰며 A C E G…로 수놓고 끝에 숫자를 붙였고, 그 아래 큰 글자 알파벳 줄은 N에서 멈춘다. 이어서 꽃나무와 새가 좌우 대칭으로 서고, 성경 구절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wisdom”은 줄 끝에서 wis와 dom으로 쪼개져 두 줄에 걸친다. 아래쪽 한가운데에는 날개를 활짝 편 큰 새, 아마 독수리인 듯한 형상이 있고 그 둘레로 바구니와 나무, 작은 네발짐승들이 흩어져 있다. 이름과 날짜는 맨 아래 작은 화환 안에 들어갔다. 실은 갈색과 주황 계열이 대부분인데 아래 두 모서리의 새만 회청색이다.
색이 먹히는 천, 모양을 봐야 하는 천
세 점은 맞추는 요령이 저마다 다르다. 색으로 조각을 나누는 방식이 얼마나 통하는지부터 차이가 난다. 앤 파자컬리의 샘플러는 붉은 테두리, 붉은 집, 붉은 술, 파란 상의처럼 색이 또렷한 요소가 많아 색 분류가 먼저 먹힌다. 48조각이면 가장자리 한 바퀴만 24조각, 절반이다. 붉은 꽃무늬가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돼 다 비슷해 보이지만, 모서리에서는 덩굴이 엇갈리는 모양이 달라서 가려낼 수 있다. 시 네 줄은 줄 간격이 고르니 위아래를 정해 주고, 이름 줄은 맨 아래라는 확실한 표시다.
해나 블룸필드의 샘플러는 갈색과 주황 한 계열뿐이라 색으로는 잘 안 나뉜다. 대신 모양을 본다. 좌우 대칭 도안이라 같은 꽃나무와 새가 두 벌씩 있어서 어느 쪽 것인지 고르는 게 일이다. 다행히 큰 새와 이름 화환이 한가운데를 붙잡아 주고, 사진에 같이 찍힌 짙은 나무 액자와 아래쪽 흰 소장 번호 라벨이 가장자리 기준이 되어 준다.
가장 별난 건 메리 그리피츠의 샘플러다. 퍼즐 이미지는 2:3 비율의 사진인데 길쭉한 천이 그 한가운데에 서 있다. 둘레는 회색과 짙은 남색 바탕이라, 화면의 70% 안팎이 천이 아닌 배경이다. 24조각(가로 4칸, 세로 6칸)으로 하면 좌우 바깥 두 열, 열두 조각에는 천이 한 올도 걸리지 않는다. 이 조각들에서 기댈 거라곤 회색과 남색이 만나는 경계선 하나다. 천이 걸친 조각은 반대로 띠 단위로 깔끔하게 나뉜다. 맨 아래 꽃무늬 띠는 색이 뚜렷해 먼저 끝내기 좋고, 가운데 십계명은 글줄 간격과, 왼쪽 판의 회색 실과 오른쪽 판의 붉은 실이 갈리는 지점을 보고 위아래를 정한다.
몇 초 만에 지나쳤을 천 앞에서
퍼즐을 하면 그림을 오래 보게 된다고 앞서 쓴 적이 있다. 샘플러만큼 그 덕을 많이 보는 대상도 드물다. 미술관 진열장 앞이라면 “옛날 자수네” 하고 몇 초 만에 지나쳤을 물건이다. 그런데 조각을 맞추다 보면 해나의 wisdom이 줄 끝에서 두 동강 난 자리, 메리가 돌판 칸에 글자를 꾹꾹 밀어 넣은 줄들, 앤의 나뭇잎이 실 한 올 한 올 도톰하게 올라온 결까지 다 보인다.
세 점 가운데 오래 남는 건 해나의 쪼개진 단어다. 줄이 모자라 wisdom을 반으로 자르기로 마음먹은 열네 살의 손이 잠깐 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