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판화가 브레비에트가 새긴 바쿠스 축제와 눈먼 행운의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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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브레비에트. 소장처 기록에는 “1598년 무렵 망트쉬르센 출생, 1642년 파리 사망”이라는 한 줄만 남아 있다. 17세기 프랑스의 판화가인데,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새긴 판화 두 점을 나란히 놓으면 분위기가 정반대다. 한쪽은 흥청거리는 술잔치이고, 다른 쪽에서는 신들이 행운의 여신 앞에 보물을 바친다.
| 작품 | 연대 | 크기 | 주제 |
|---|---|---|---|
| 바쿠스 축제 | 1600~1642 | 9.4 × 24.5cm | 술의 신을 둘러싼 축제 |
| 유피테르, 플루토, 넵투누스가 포르투나에게 보물을 바치다 | 1624 | 25.2 × 15.6cm | 신들과 행운의 여신 |
궤짝과 벽널을 위한 도안
「바쿠스 축제」는 가로로 터무니없이 긴 화면에 사티로스와 님프, 아기 천사들을 줄지어 세웠다. 17세기 전반 파리에서 일한 브레비에트는 고대 신화의 축제를 프리즈처럼 길게 펼친 에칭을 여러 장 남겼고, 이런 판화는 가구나 벽 장식의 밑그림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 장은 벽에 걸어 두고 감상하려고 찍었다기보다, 목수나 장인이 궤짝이나 벽널에 무늬를 새길 때 곁에 펴 두던 도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등장인물도 정해진 배역 그대로다. 염소 다리의 사티로스, 뛰노는 님프, 나무 아래 앉은 술의 신, 그리고 염소와 아기 천사까지 고전 신화의 도상을 충실히 따른다.
눈을 가린 여신 앞의 세 신
「유피테르, 플루토, 넵투누스가 포르투나에게 보물을 바치다」로 넘어오면 공기가 무거워진다. 눈을 가린 여인이 구름 위에 서서, 두 남자가 받쳐 든 보물 상자를 내려다본다.
하늘을 다스리는 유피테르, 지하의 플루토, 바다의 넵투누스가 저마다의 부를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에게 바치는 우의화다. 포르투나의 가린 눈은 행운이 공정하지도 않고 내다볼 수도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셋으로 나눠 가진, 신화에서 가장 힘센 존재들이 그 눈먼 여신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행운 앞에서는 신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17세기 유럽에 흔하던 도덕적 우의화로, 사람의 운명은 능력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우연에 달렸다는 생각에 신화의 옷을 입혔다.
같은 손끝에서 나온 두 감정
둘을 나란히 두면 브레비에트가 얼마나 넓게 오갔는지 보인다. 술과 춤과 맨몸이 뒤엉킨 소란이 있고, 신들마저 굴복하는 운명에 대한 차분한 생각이 있다. 그런데 선은 같다. 가늘게 그은 선과 소용돌이치는 구름은 브레비에트 판화의 버릇 같은 것이어서, 「포르투나」의 하늘에서도 「바쿠스 축제」의 어지러운 군상에서도 같은 손이 느껴진다.
렘브란트나 고야처럼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남은 기록이라고 해야 태어난 곳과 활동 시기 정도다. 그래도 두 판화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신화가 사람들의 생활로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보여 준다. 한 장은 가구를 꾸미는 도안이 되었고, 한 장은 교훈을 전하는 그림으로 퍼졌다. 화가의 이름이 흐려졌다고 해서 그 그림이 당시 사람들의 살림과 생각 속에 있었다는 사실까지 지워지지는 않는다.
흑백 선을 밀도로 가르기
두 장 모두 흑백 선으로만 된 판화라 드가와 로트렉 소묘에서 썼던 밀도 구분법이 그대로 통한다. 오래 붙잡히는 곳은 「바쿠스 축제」의 흰 바탕이다. 화면이 워낙 길어 조각이 납작하고 인물도 작은데, 흰 종이만 든 조각은 서로 거의 똑같이 생겼다. 인물의 검은 머리와 나무의 진한 부분을 먼저 골라 순서대로 늘어놓고, 흰 조각은 위아래 가장자리에서부터 채운다. 24조각이나 48조각처럼 적게 자를수록 흰 조각에도 선 한 줄씩은 걸린다.
「포르투나」는 형태가 커서 덜 헤맨다. 48조각으로 잘라도 여인의 밝은 몸, 두 남자의 얼굴, 보물 상자가 금방 서고, 위쪽 구름과 독수리의 곡선, 선이 촘촘한 어두운 조각만 미리보기와 견주어 가며 채우면 끝난다. 두 판화 모두 아래쪽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서, 그 조각을 찾으면 화면 방향이 단번에 잡힌다.
여러 화가의 화풍을 흉내 낸 디트리히와 견주면 브레비에트는 반대편에 서 있다. 남의 화풍을 빌리지 않고 제 손 하나로 흥청거림과 체념을 다 새겼다. 판화를 새긴 지 300년도 더 지나 남은 건 망트쉬르센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죽었다는 기록 한 줄이지만, 그 한 줄 뒤에 염소 다리의 사티로스와 눈 가린 여신이 함께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