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이 아닌 얼굴들, 고승의 초상과 손으로 베낀 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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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아래 발판 위에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위에 앉은 사람은 보살도 부처도 아닌,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노승이다. 한국 불교 미술 하면 관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의 얼굴부터 떠오르고, 그런 보살 그림은 고려 불화 네 점에서 이미 다뤘다. 하지만 불교 미술에는 보살이 아닌 얼굴도 많다. 실제로 살았던 스님의 초상, 손으로 베낀 경전, 부처를 지키는 신들의 무리. 다섯 점으로 그 폭을 가늠해 본다.
| 작품 | 시대 | 형식 |
|---|---|---|
| 서산대사 진영 | 조선 후기 | 고승 초상 |
| 법화경 사경 | 고려, 1340년 무렵 | 손으로 베낀 경전 |
| 석가여래삼존도 | 조선, 1565년 | 불화 |
| 수월관음도 | 고려, 14세기 | 불화 |
| 범천도 | 조선, 16세기 후반 | 신중도 |
일흔 넘어 승병을 모은 스님
「서산대사 진영」에서는 머리를 깎은 노승이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본다.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은 임진왜란 때 일흔이 넘은 나이로 전국의 승병을 모아 왜군과 싸웠다.
이런 초상을 진영이라 한다. 조선 후기 절에서는 큰스님의 초상을 그려 조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의자에 앉아 정면을 보는 자세, 의자 아래 발판에 놓인 신발 한 켤레는 진영이 따르는 정해진 형식이다. 부처나 보살을 그리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실제로 살았던 사람을 기리는 그림이다. 누군가를 잊지 않으려고 남긴 그림이라는 점에서는 조선의 기록화와도 한 줄기다.
그 형식 덕에 의자 다리와 발판의 곧은 선이 화면 아래를 단단히 받친다. 48조각으로 잘라도 이 선들로 뼈대부터 세우고 나면 얼굴과 가사를 채우기가 한결 수월하다.
쪽빛 종이에 금으로 쓴 경전
「법화경 사경」은 엄밀히 말하면 그림보다는 책이다. 쪽빛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과 은으로 글씨를 썼고, 첫머리에만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금선으로 그려 넣었다.
사경은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는 일이다. 고려에서는 종이를 쪽빛으로 물들이고 금가루와 은가루로 글씨를 쓰며 공덕을 쌓았다고 한다. 한 자 한 자 베껴 쓰는 일 자체가 곧 신앙이었다. 왕실과 귀족이 발원해 만들었고, 몽골 간섭기 고려 불교 미술을 대표하는 유물로 꼽힌다. 높이 23센티미터의 작은 책인데, 거기 들인 공은 크기와 비교가 안 된다.
퍼즐도 48조각이면 쪽빛 바탕 위로 금빛, 은빛 글씨가 줄지어 있어 글줄 방향만 따라가도 조각이 이어진다. 막히는 건 왼쪽의 금선 그림이다. 글씨 조각과 섞어 두면 가는 선이 묻혀 버려서, 처음부터 따로 모아 둔다.
유교 국가에서 벌인 큰 불사
「석가여래삼존도」는 석가여래와 두 보살을 금과 채색으로 그렸다. 1565년은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가 회암사 중창을 기념해 불화 400점을 만들게 한 해이고, 이 그림도 그때 나온 것으로 보인다.
유교를 나라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 왕실이 이만한 불사를 벌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이때의 그림들이 조선 전기 불화를 가늠하는 기준작이 되었다. 왕실 여성이 이 정도 규모로 불교 미술을 후원했다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같은 관음, 다른 손
「수월관음도」는 앞선 글에서 다룬, 같은 미술관의 다른 수월관음도와 나란히 놓고 보면 좋다. 같은 도상이 화가와 시기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 보인다. 이 그림 쪽이 광배의 원이 더 크고 또렷하며, 금니도 더 많이 남아 있다.
고려 불화의 색이 오래 버티는 데는 까닭이 있다. 비단 뒷면에도 색을 칠해 앞면의 색을 은은하게 받쳐 주는 배채법을 썼다. 앞에서 한 번, 뒤에서 한 번 색을 올린 그림이다.
삼존도와 이 관음도는 가운데 인물과 주변 인물의 자리가 뚜렷이 갈린다. 가운데 부처나 관음부터 맞추고 광배의 둥근 테두리를 따라 바깥으로 넓혀 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 48~100조각 사이가 무난하고, 조선시대 회화 퍼즐 가이드에 쓴 요령도 대부분 그대로 통한다.
삼베에 그린 신들의 행렬
「범천도」는 가로세로 모두 2미터가 넘는 큰 그림이다. 스무 명이 넘는 인물이 범천을 둘러싸고 늘어서 있다. 범천은 인도의 신 브라흐마가 불교로 들어와 부처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 존재다.
이 그림에서 먼저 눈에 걸리는 건 바탕이다. 비단 대신 값싼 삼베에 그렸다. 임진왜란 전후로 절 살림이 넉넉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이 여기서 나온다. 그래도 인물마다 얼굴이 다르고 악기도 여러 가지여서, 이 그림은 조선 시대 악기를 연구하는 자료로도 쓰인다. 신앙을 위해 그린 그림이 뜻밖에 그 시대 생활사를 들려준다.
100조각으로 잘라도 스무 명 넘는 인물을 한꺼번에 맞추려 들면 지친다. 서너 명씩 묶어 한 무리씩 끝내는데, 사람마다 든 악기가 달라서 무리를 가를 때 좋은 표시가 된다.
초월한 얼굴, 사람의 얼굴, 이름 없는 손
다섯 점을 함께 놓고 보면 한국 불교 미술이 보살의 얼굴을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게 보인다. 실제로 살았던 사람을 기리고, 경전을 베끼는 일을 신앙으로 삼고, 왕실이 큰돈을 들여 후원하고, 살림이 어려운 절은 형편껏 재료를 구해 신들을 그렸다.
부처와 보살의 초월한 얼굴 옆에 늙은 서산대사의 맨얼굴이 있다. 그리고 사경의 금빛 글씨 뒤에는 얼굴조차 남기지 않은 누군가가 있다. 한 자도 틀리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을 그 사람의 손이, 다섯 점 가운데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다.